공동체, 사명, 절연, 시지프스의 바위
사명(Mission)이란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보냄을 받은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나와의 관계 회복이라는 존재적 부르심을 이루신 그분께, '믿음의 걸음마' 시절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는 단순히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내 삶을 내어드리고 싶었다. 그것은 아무런 사심이나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의 발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은 내가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서 가차 없이 나를 몰아가시며 특정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셨다. 혹자가 이를 결과론이라 해도 반박하고 싶지 않다. 내가 보기에도 결과론적으로 그 선택이 하나님 나라에 더 유익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공무술 도장 사범이 적성과 능력에 맞지 않아 여주 도자기 공장으로 도피하다시피 떠났지만, 결국 다시 그분의 인도 아래 사범의 직무로 복귀했다. 결과는 앞서 기술했듯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선택이었다.
내 사명이 이 길인가 싶을 때, 하나님은 나를 정보처리 분야로 인도하셨다. 의아해하면서도 그 길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동안 많은 복음적 열매를 맺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길이 내 사명이라 믿고 전문적인 준비를 하려 할 때, 하나님은 다시 길을 막으시고 나를 e비즈니스의 길로 인도하셨다. 2년간 맨땅에 헤딩하듯 고생하다 대형 웹에이전시에 입사해 성장하면서, 이 길이 내 사명이자 직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상황을 통해 나를 다시 맨발로 광야에 세우셨다. 그 모든 과정에 내 자의적인 선택은 없었다.
어느 날, 인터넷 기술인 웹을 가장 잘 활용하는 집단이 무속인들이고, 정작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집단이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대기업은 최신 과학 기술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지만, 소상공인들은 디지털 전환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아우르는 아이템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래, 이것을 하라고 주님이 나를 이 분야로 인도하셨나 보다. 이것이 ○B와 나의 사회적 사명이구나.'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작은 불안감이 숨을 쉰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나의 욕심이라면?'
며칠 전, 일본 도쿄에 파견 나갔던 이용의 개발자가 나를 찾아와 보수 없이도 좋으니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한다. 두산 프로젝트에서 몇 달 함께 일했을 뿐이고, 이후 디지털FK의 일본 개발자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연락해 일본으로 파견을 보낸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다른 동료들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주님이 우리를 모으신 이유는 단순히 웹 에이전시 업무만 수행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나를 이 자리에 강권하여 앉히신 주님이 함께하는 동료들 또한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이 아이템을 우리 기업의 사회적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대표와 논의하였으며, 마침내 이 청사진을 기업의 핵심 비전으로 확정했다.
성경 속 사명자들의 삶은 대개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은 물론, 노년에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누벼야 했던 이사야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저주받은 이름의 자녀를 얻어야 했던 호세아까지. 제자들의 마지막 또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비참한 결말이었다.
과연 내가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의 중심을 보시겠지만, 세상은 결코 알지 못할 가치를 위해 삶을 투신해야 하는 그 외롭고 좁은 길을 가야 하기에, 나는 맘은 설렘보다 거룩한 부담감이 내면을 채워나간다.
나는 안다. 내가 그저 평범한 삶의 안락함에 안주한다면, 사단은 나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 마귀 또한 우는 사자처럼 나를 삼키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내 주변을 흔들어 나를 찌를 것이며, 굶주린 맹수처럼 나를 물어뜯고 삼키려 달려들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길에 들어서기를 주저하지 않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단아, 마귀야, 그리고 운명이여, 올 테면 와라. 이 땅에서 춥고 배고프고 외롭다가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품으신 주님의 품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에, 나는 오늘도 기꺼이 춥고 배고프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